최일남 <흐르는 북>
◆ 줄거리 ◆
선천적인 예술적 기질과 역마살로 인하여 처자와 가정을 외면한 채 살아온 주인공 민 노인은 유배자(流配者)와 별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민 노인의 아들은 자신의 사회적 체면도 있고, 아버지 민 노인이 북[鼓] 때문에 가정을 버리고 허랑 방탕한 한 평생을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북[鼓]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 왔다. 그러나 아들 성규의 친구들이 놀러온 날 저녁에 사건이 벌어진다. 그것은 북[鼓]에 대한 향수가 점점 멀어져 갈 무렵, 손자 성규의 친구들이 권유를 하자, 민 노인은 그동안 놓았던 북채를 다시 잡았던 것이다. 민 노인은 손자 친구들이 돌아간 다음 아들로부터 핀잔을 듣는다.
그러나 가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민 노인의 예술적 기질과 삶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손자 성규뿐이었다. 어느 날, 성규는 할아버지 민 노인에게 자기 학교의 봉산 탈춤 공연에 참여해 달라는 제의를 한다. 수많은 고민 끝에 민 노인은 이를 승낙한다. 그리고 아들 내외의 눈을 피해 북을 꺼내 와서 젊은 패들과 연습에 돌입했다. 비록 연배가 한참 차이나는 젊은이들과의 연습이었으나 민 노인에게는 큰 즐거움과 행복이 아닐 수 없었다. 공연 당일, 민 노인은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잃었던 예술 혼을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러나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진숙 어머니의 고자질로 아들 내외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민 노인을 탓함과 동시에 아들 성규를 호되게 꾸짖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성규는 데모를 하다가 붙잡혀 들어갔다. 손녀 수경이와 함께 집에 남게 된 민 노인은 '아무래도 그 녀석이 내 역마살을 닮은 것 같아. 역마살과 데모는 어떻게 다를까.'하고 생각하면서 손녀의 물음에도 아랑곳없이 둥둥둥 더 크게 북을 두드렸다.
작품 감상의 길라잡이
<흐르는 북>은 1986년 ≪문학사상≫에 발표된 작품으로서 제10회 이상 문학상(李箱文學賞) 수상작이다. 1980년대의 한 중산층 가정을 배경으로 ‘북’에 대한 열정으로 평생을 살아온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를 원망하는 아버지, 그리고 둘을 동시에 이해하고자 하는 손자의 모습을 통해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합을 모색하고자 하는 시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민 노인은 가정생활보다는 예술가 정신과 전통 세계의 가치관에 충실한 예술가인 반면에, 민대찬은 아버지의 그러한 무책임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실리적이고 세속적인 가치를 좇는 인물이다. 이 둘의 갈등 구조 사이에 성규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할아버지-아버지-손자’로 이어지는 세대교체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한 흐름과 함께 인간이 근원적으로 안고 있는 존재론적 고민을 그리고 있다. 누구나 삶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현실과 이상, 안정과 변혁의 갈등을 세대 간의 대립과 화해를 통해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80년대 우리 사회의 현실적 단면과 중산층의 이기적 삶의 세태를 배경으로 하면서 속물적 삶과 본원적 삶과의 심한 갈등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아들 대(代)를 지나 손자 대(代)에서 그들의 본원적 삶이 다시 빛을 얻게 된다는 감동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결국 <흐르는 북>은 현대 사회 속에서 상처받은 윤리가 비명을 울리는 것에 대한 정감의 기록인 것이다.
최일남 <흐르는 북> -2-
또한, <흐르는 북>은 인간성이 상실된 시대인 70년대와 80년대에서 인간이 잃어가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또 여기에서 파생되는, 현대인의 삶의 가치가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묻고 있다.
◉ 등장인물 ◉
(1) 민 노인 : 평생을 북을 치며 살아온 예술인(藝術人)으로서 가족을 버리고 방랑하다가 아들 집에 얹혀사는 노인.
(2) 민대찬(아들) : 자수성가한 인물로 가족을 돌보지 않은 아버지 민 노인에게 원망을 지니고 그의 삶을 부정하는 인물. 홀로 고학해야 했던 불행한 과거에 집착하여 아버지 민 노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중년 사내.
(3) 성규 : 민 노인의 손자(대학생). 할아버지에 대한 아버지의 감정도 이해하고, 할아버지의 삶에서 긍정적인 가치도 찾을 줄 아는 인물. 할아버지의 광대적 삶을 이해하려 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갈등을 화해시키려 노력하는 인물.
▦ 내용 고갱이 ▦
1. 갈래 : 단편소설, 가족사소설
2. 성격 : 사실적, 현실 비판적
3. 배경 : 1980년대 서울
4. 시점 :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 작품은 전지적 작가 시점을 택하고 있으나, 서술자는 사건에 개입하지 않고 객관적인 상황을 전달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5. 표현상 특징
(1) 상징적인 소재를 통해 시대 상황을 암시함.
: ‘북’을 매개로 하여 전통 세대와 기성세대, 신세대 간의 갈등과 화합의 양상을 보여 줌으로써 1970년대 우리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림.
(2) 인물 간의 첨예한 입장 차이가 긴박한 분위기를 조성함.
: 민 노인과 아버지, 아버지와 성규 사이에는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갈등을 빚고 있다.
(3) 의성어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인물의 심리와 처지를 드러냄.
: 데모로 붙잡혀 간 성규 때문에 아들 내외가 돌아오지 않는 밤에, 술을 마시며 북을 치는 민 노인의 모습은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혹시 그 일이 자신이 북에 미쳐버린 것 때문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과 초조함, 자책감 등의 심리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임.
(4) 문제 상황만을 제시하고 해결 과정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둠.
: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세대 간의 화해의 가능성만이 언급되고 있을 뿐 그 결론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이처럼 문학은 문제 해결의 결론을 모두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 제기 그 자체만으로도 그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6. 제재 : 북
최일남 <흐르는 북> -3-
☞ 제목 ‘흐르는 북’의 의미
이 작품에서 민 노인의 삶의 궤적(軌跡 어떠한 일을 더듬어 온 흔적)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소재가 '북'이라면, '흐르다'라는 용어는 세대 간의 갈등이 극복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할아버지 세대를 부정하는 아버지 세대에 의해 '북'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손자에 의해 보존되며 되살아나고 있는데, 이는 표면적으로 단절된 것처럼 보이는 세대라 할지라도 내면적으로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과 고통을 함께 하고 이를 같이 극복해 나가야 하는 공동의 과제를 안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흔히 강이나 역사를 '흐른다'고 표현하듯이 세대 간의 갈등 속에서도 할아버지의 북소리가 이어지고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세대 간의 이해와 화합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민 노인 (전통 세대) |
|
갈등 |
|
민대찬 (기성세대) |
↔ | ||||
긍정, 이해\ |
북 |
↗ 갈등 | ||
| ||||
성규 (신세대) |
▣ 어휘 깁고 더하기 ▣
*오히려 전세대끼리의 갈등이 다음 세대에서 쾌적한 만남으로 이어진다면, 그건 환영할 만한 일이고, 그게 또 역사의 의미 아니겠습니까?
: 작가의 주제 의식이 나타난 구절임.
*고깝게 : 섭섭하고 야속하여 마음이 언짢게.
*“아무래도 그 녀석이 내 역마살을 닮은 것 같아. 역마살과 데모는 어떻게 다를까.”
: ‘민 노인’이 자신의 역마살과 ‘성규’의 데모가 닮았다고 판단한 근거는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예술 정신을 추구했던 자신과, 일상에 안주하지 않고 사회의 부조리에 반발하여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성규의 행위에 공통점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임. 즉 일반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거부.
*새살거림 : 자꾸 실없이 까불며 웃음.
☺··· 주제는 바로 ☞ (1) 예술 혼과 인간의 본원적인 삶
(2)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합 모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