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철 <탈향>
◆ 줄거리 ◆
6·25전쟁에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한 대규모 1·4후퇴 당시, 엉겁결에 LST(Landing Ship Tank 전차양륙함)에 올라 한 마을에서 함께 월남한 두찬, 광석, 하원 그리고 '나'는 부산에서 궁핍한 피난살이를 시작한다. 이들은 부산 부두 하역장에서 육신을 팔아 간신히 끼니를 이어 가며 생활을 한다. 이들에게는 기거할 방이 없다. 그래서 이들은 정차되어 있는 화차(火車)에 숨어들어 잠깐씩 잠을 청한다. 이들의 생활은 이처럼 극도로 어렵지만 이들은 서로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함께 이 고통스러운 생활을 이겨내기를 맹세한다. 이들은 화찻간에서 고향에서 내리던 눈, 잘 웃던 이웃집 형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지면서 나이가 많은 두찬과 광석은 '나'와 하원을 귀찮게 생각한다. 하원은 입만 열면 고향 이야기이고, 눈물을 흘린다. 급기야 광석이 화차에서 실족하여 죽는 사건을 계기로 이들의 관계는 점차 소원(疏遠)해지기 시작한다. 이들 세 사람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며 점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마침내 두찬은 광석의 죽은 후 이들을 버리고 도망했으며, 이젠 '나' 역시 하원을 버리고 도망할 궁리를 한다.
작품 감상의 길라잡이
이 작품은 6·25 전쟁 당시 부산을 배경으로 하여 월남한 실향민들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이러한 맥락에서 귀향 소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피난민의 고통스러운 삶만을 그리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곧 이 작품은 고향을 잃은 것에 대한 한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개척할 길을 찾고 있는 실향민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의 제목 역시 단순한 ‘실향(失鄕)’과는 다른 ‘탈향(脫鄕)’인 것이다. 여기에는 열아홉의 나이로 단신 월남하여 부산에서 노동을 하며 생계를 해결해야 했던 작가의 실제 체험이 담겨 있다.
등장인물들은 고향을 생각하는 동안만큼은 행복하다. 하얗게 함박눈이 내리던 고향, 잘 웃던 이웃집 형수의 웃음이 기억 속에서 환하게 밝혀 있는 고향을 그들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고 있지만, 이들이 살고 있는 현실은 꿈과는 다르게 참혹하다. 같은 고향이라는 공동체 의식만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현실의 이해관계가 그들을 갈라놓은 것이다. 마침내 이 작품의 결말에서 '나'는 돌아갈 기약이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만 짜고 있는 하원을 떠나기로 결심하게 된다. 즉 '나'는 돌아갈 기약조차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만 짜고 있는 감상주의적 태도와 결별해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처럼 '탈향'을 감행한 것이다. '나'는 이로써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나'의 모습은, 전후 소설이 소박한 휴머니즘과 비장한 영탄조에 이끌리는 것에서 벗어나 객관적 현실의 구체적 탐구로 나아가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고 있는데, 바로 여기서 이 작품의 문학사적 의미가 있다.
이호철 <탈향> -2-
◉ 등장인물 ◉
(1) 나 : 19살 청년으로 홀로 월남하다 같은 고향의 두찬, 광석, 하원을 만나 부산 역 근처의 화차 칸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물.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로 '나'를 포함한 네 인물이 피난지에서 갈라서게 되는 과정을 서술한다.
(2) 두찬 : 스물넷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조숙해 보이며, 사교성이 없고 말이 없는 성격. 진득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융통성이 없고 무뚝뚝하다. 또한 고향에 대한 말 없는 집착을 가지고 있으며, 속없이 타향에 적응하려는 행동은 쓸데없다고 생각한다.
(3) 광석 : 두찬과 동갑임, 그러나 두찬과는 달리 사리 판단이 민첩하고 사교성이 있으며 말이 많고 타향에 대한 적극적인 적응 행동을 보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여러모로 두찬과 대비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4) 하원 : 18살의 어린 나이로 여리고 순수하며 의타적(依他的)이다. 그의 순수성은 주변 인물로 하여금 연민을 일으키기도 하나 한편으로 모두가 극단적인 삶 속에 던져진 상황이라 짐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두찬 *무뚝뚝한 성격 *현실에 적응하지도 못하고 과거를 지향하지도 않는 실패자 |
대조 ↔ |
광석 *사교성 있는 성격 *귀향할 수 없는 현실을 가장 먼저 깨닫게 되지만 그 현실에 희생 당함 |
광석의 죽음 |
→ |
두찬의 자책감 심화 나, 두찬, 하원 간의 소원한 관계 형성 |
하원 *고향에 대해 감상적인 태도를 지님 *귀향에 대한 미련을 간직한 인물 *과거 중심의 가치관을 싱징함 |
대조 ↔ |
‘나’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고향에 대한 감상적 태도에서 벗어남 |
▦ 내용 고갱이 ▦
1. 갈래 : 단편 소설, 전후 소설, 귀향 소설, 성장 소설
2. 배경 (1) 시간적 : 6·25 전쟁 당시(중공군 남하 이후)
(2) 공간적 : 피란지 부산(화찻간과 부두 근처)
3.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1인칭 관찰자 시점이 혼재하고 있다. 왜냐하면 1인칭 시점으로 '나'의 관점에서 인물과 정황들을 묘사하고 있으나, '나'의 주관적 평가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고 객관적인 관찰과 묘사에 가깝기 때문.)
4. 문체
(1) 간결한 문체로 사건을 속도감 있게 전개하고 있다.
(2) 인물들의 대사에 사투리를 사용하여 인물을 현실감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이호철 <탈향> -3-
5. 표현상 특징
(1) 전쟁의 상흔(傷痕)을 소재로 하였으나, 분단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기보다는 개인의 의식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함.
(2) 공동체적 생활의 붕괴와 근대적 자아의식의 각성을 월남민의 실향 의식을 바탕으로 형상화함. 즉 고향을 버리고 월남한 실향민들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음.
(3) 전후 문학이면서 현실의 모습을 깨달아 간다는 점에서 성장 소설에 가까움.
(4) 6·25 전쟁을 반영한 전후사실주의 문학이고, 작가의 실제 체험이 담겨 있음.
6. 제재 : 월남 실향 청년들의 절박한 삶
7. 출전 : ≪문학예술≫ (1955)
◎ 구성 돋보기 ◎
☞ 순차적 구성으로 부분적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 역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친밀하던 네 사람의 관계가 점차 벌어지면서 갈등이 고조되어 가는 단순 구성을 보이고 있다.
[발단] 부산에 피난 와서 화차 칸을 전전하며 위험하게 살아가는 광석, 두찬, 하원과 나
[전개] 성격 차로 인해 광석과 두찬 사이가 벌어짐
[위기] 광석이 출발한 화차에서 뛰어내리다 다쳐서 죽음
[절정] 광석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던 두찬마저 '나'와 하원을 버리고 떠남
[결말] 남은 둘이서 잘 살아가자고 말하는 하원을 버리고 떠날 생각을 하는 '나'
☞ 네 명이 기거하는 ‘화찻간’은 무엇을 상징하는 장소인가?
화찻간은 떠돌이 생활을 하는 네 사람이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그러나 기차의 일부분인 화차는 언제 출발할지 모르는 장소로, 출발하면 자다가도 뛰어내려야 하는 불안정한 임시 거처에 불과하다. 그것은 광석의 죽음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사람 살 데가 못 되는 곳에서 살아야 하는 이 네 사람의 사회적 처지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또한 도시의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삶, 산업 사회에서의 삭막한 삶을 상징한다.
▣ 어휘 깁고 더하기 ▣
*하원이는 흠칫 놀라 : 두찬이가 떠난 것으로 여기고 좋아하던 참이어서.
*탁배기 : ‘막걸리’의 북한어
*구석에서 하원이가 다시 소리내어 흑흑 흐느꼈다.
: 하원이 두찬의 언행을 보고 겁에 질린 데 기인함.
*괄세 : 괄시.
*“어잉, 이 쥑일 새끼,~광석아아 ······ 광석아하아.”
: 광석의 죽음 당시 자신을 억지로라도 광석에게 데려가지 않았다는 것을 책망하는 것으로, 광석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반어적으로 표현함.
*두찬이는 벌렁 자빠져서 화차 안이 쩌렁쩌렁하도록 그냥 어이어이 울어댔다.
: 광석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미온적으로 대처했던 것에 대해 두찬이 갖게 된 자책(自責)의 심정으로 인한 것.
이호철 <탈향> -4-
*대구 : 잇따라 거듭하여
*눈물이 두 볼에 흘러내렸다.
: ‘나’가 이미 고향에 대한 감상적 태도로부터 벗어나기를 마음먹은 후 하원과 이별하게 된 것에 따른 안타까움에 기인함.
☺··· 주제는 바로 ☞ (1) 월남 실향민의 황량한 삶과 그 적응의 방식
(2) 전쟁으로 인해 공동체적 삶으로부터 벗어난 젊은이의 상처와 내적 성장
▶ 이것도 알아두기
1. 이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 체험을 소설화한 작품 같은데, 작품 속의 ‘나’를 작가 자신으로 보아도 되는가?
: 작가 이호철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동원되었다가 1950년 12월 9일 부산으로 월남한 실향민이다. 인민군으로 복역했던 체험 및 분단으로 인해 실향민 신세가 되었던 경험은 이후 그의 소설에서 여러 번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만큼 이호철 소설에서 ‘실향’과 ‘분단’은 갈등의 중심 요인이다. 따라서 <탈향>에서의 ‘나’의 의식과 ‘나’가 처한 상황은 작가의 자전적 체험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다만 소설가는 자신의 체험을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주제 의식에 따라 재창조되므로, <탈향>에서도 분단 문제가 직접적인 주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2. 그렇다면, 이 작품의 제목이 ‘실향’이 아니라 ‘탈향’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작가는 ‘탈향민’이 아니라 ‘실향민’이지 않은가?
: 만약 이 소설의 제목이 ‘실향’이라면, 타의에 의해 고향을 잃고 그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고통으로 힘겨워하는 두찬이나 하원이가 중심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도 분단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며 민족적이고 참여적인색채가 짙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제목이 ‘스스로 고향을 벗어난다’는 어감을 주는 ‘탈향’이라는 점, 그리고 ‘나’가 귀향을 포기하지 않는 하원을 내심 버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안온(安穩 조용하고 편안함)하고 평화로우나 비현실적인 고향의 세계, 즉 과거의 세계로부터 벗어나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체적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을 극복해 내는 새로운 결단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생각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전쟁이 준 상처를 그리거나, 인간성 회복을 부르짖는 다른 전후 소설과는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탈향>은 ‘고향’으로 상징되는 근대적인 삶, 소박하고 인정 어린 (과거의) 공동체적 삶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개인으로 서서 현실을 탐구해야 한다는 근대적 각성(깨달음)을 그린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소설은 일종의 성장 소설에 해당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원을 버리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않은가?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이 작품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은 서로 친척과 동향인으로 엮여져 있다. 이런 관계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별거 아닌 관계이지만,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 보면 서로가 서로를 책임지고 챙겨 주어야 하는 운명 공동체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벗어나 독자적인 개인으로 서고자 하는 ‘나’의 욕망과 책임감 사이의 갈등을 보여 주는 것이 ‘나’의 눈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윤리 의식일까 자존심이랄까 하는 것이 남아 있음은 이호철 문학의 섬세함이고 가치이다.